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스 악셀 폰 페르센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그는 [[프랑스]] 왕비였던 [[마리 앙투아네트]]의 '''[[불륜]]상대이자 조력자'''로서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. 첫눈에 반한 운명적인 사랑은 아니었고, 과연 육체적 관계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나, 왕비와 페르센 사이에는 [[플라토닉 러브|깊은 정신적 사랑]]이 있었다는 증거가 많이 남아 있다. 특히 페르센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이자 왕비라고 언급했다. 어쨌든 당시 프랑스 내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공공연했던 것으로 보인다. 페르센은 염문을 피하고 또 경력을 쌓기 위해 [[프랑스군]]에 입대한 후 참전하는 등 [[베르사유 궁전|베르사유]]에서 떠나있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다. 페르센은 [[프랑스 혁명]] 발발 이후 철저히 왕당파[* 당시 유럽 각국들의 왕실은 [[프랑스 혁명]]을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으므로 외국인이 [[프랑스]] 왕실을 도왔다고 이상하게 볼 수만은 없다.]로의 소임을 지켰다. 페르센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외적으로 고립된 [[루이 16세]] 일가에게 지원을 했다. 그러나 [[마리 앙투아네트]]가 주도했고 페르센이 도왔던 [[바렌 사건]]은 실패하고, 페르센이 프랑스 국외에서 왕가를 지키려고 시도했던 모든 노력들 역시 실패로 끝났다. 결국 [[루이 16세]]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형당한다. 이를 브뤼셀에서 전해듣고는 크게 슬퍼하고 절망한[* 얼마나 슬퍼했는지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[[마리 앙투아네트]]를 '[[순애보|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였고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한순간도 없었으며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깊이 사랑했고 수천 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었던 여인]]'이라고 표현하면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고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할 정도였다.] 페르센은 본국으로 돌아가 정치가가 되었다. 그는 민중에게 잔인한 태도를 취했고 그로 인해 신망을 잃었다. 또 [[루이 16세]] 부부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[[마리 테레즈 샤를로트|마리테레즈 샤를로트]]가 포로 교환으로 [[프랑스]]에서 풀려나자 재산을 어느 정도 찾도록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. [[마리 앙투아네트]]에게 받은 편지 관련은 [[신비한 TV 서프라이즈/2021년#s-43|2021년 11월 7일]]자 [[신비한 TV 서프라이즈]]에서 다뤄졌다. [[https://www.newsen.com/news_view.php?uid=202111070930120010|기사]] 1810년 [[스웨덴]] 왕태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페르센이 왕태자를 독살했다는 루머가 널리 퍼졌는데, 그에 개의치 않고 장례식에 참석하려 거리로 나섰다가 분노한 민중들 중 선원인 오토 요한 텐더펠트에게 살해당했다. 그가 살해당한 [[6월 20일]]은 실패한 [[바렌 사건|바렌 도주사건]]이 일어났던 날이기도 했다. 사후 오해가 풀렸으며 페르센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진다. 만화 [[베르사이유의 장미(만화)|베르사이유의 장미]]의 영향으로 흔히 미남으로 인식한다.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초상화에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한데, 그가 워낙 미남이라 어디에서나 인기가 많았다는 당대 기록이 여럿 남아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